이 나라의 최고 경영자가 공무원연금을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방치할 경우 매년 상당한 규모의 금액을 정부에서 매년 세금으로 충당해 줘야하므로 개혁할 필요가 있다하여 연내로 마무리하겠다 하니 여당의 최고 우두머리가 연내에는 어렵다고 초를 치더니 몇일 안가서 꼬리를 슬그머니 내린 일이 있었다.같이 힘을 합하여도 될듯 말듯한 중요한 일을 미리부터 된다 안되다 하는 것이 별로 보기에도 좋지않을 뿐더러 그렇게 말한 본인에게도 그리 플러스요인은 아닌 것 같아 습스레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오늘 조간신문에 보니 이제는 야당의 우두머리가 아예 드러 내놓고 민노총과 손 잡고 공무원연금개혁을 저지하기로 했단다.물론 “사회적합의기구” 구성 전까지라는 단서는 달았지만...
이것이 당사자인 공무원들이 합의를 해준다고 믿는건지? 사회적 합의가 가능하다고 보는건지? 모두들 정신세계가 의아스럽다.
아예 공무원들에게만은 특별히 온 국민이 힘을 모아 세금으로 현재와 같은 연금방식으로 계속 지원해주는 것이 합당하다. 이렇게 발표를 하든가.
공무원 및 그에 준하는 연금수령자와 사회 평균치의 수혜자와 어느정도 균형이 맞다면 모르되 그 불균형과 관련된 심각성은 다들 인정하면서도 한 편에서 불합리한 점을 개선,추진하면 힘을 합하여 도와 주는 것이 위정자들의 소임이자 국민에 대한 예의 이며 세비를 받는 근원일진데 이렇게 훼방을 놓다니, 당대표 취임시 ‘장비의 외모에 조조의 지혜‘를 가졌다고 스스로 읊조린 것과는 퍽 대조적이다.
기원전 중국 춘추시대 월나라에 범려(范蠡)라는 재상이 있었다.
이 양반이 젊었을 때에 유명한 관상쟁이 한테 자기가 크면 이 나라의 재상이 될 수 있겠느냐고 물으니 “그대의 얼굴로 재상은커녕..”하고 난색을 표하였다.
그러자 범려는 의원은 될 수 있느냐고 물으니 관상쟁이가 의아해하며 재상을 꿈꾸는 양반이 천직(賤職)인 의원이 되겠다하니 하도 수상하여 왜 의원이 될려고하는지 연원을 물으니 자기가 재상이 되어 훌륭한 정치로써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싶었는데 그것이 불가능하면 차라리 용한 의원이 되어 병들어 고생하는 백성들의 고통이라도 들어주고 싶다하니 관상쟁이가 무릎으 탁 치며
“그대의 마음이 그러할진대 재상이 되고도 남음이 있겠오” 하였단다.
물론 정치하시는 분들의 정치적인 발언을 두고 가타부타할 생각은 아얘 없으며 그렇게 할만한 식견도 없지만 자기를 역사적인 인물과 동일시 하여 민초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것 만은 그냥 넘겨서는 안될 것 같다.
이제와서 장비가 어떠한 인물인지,조조가 어떤 인물인지 여기서 논하는 것 자체가 가치없는 일로 여겨진다.그네들 근처에 얼씬 하지도 못하면서 감히 그네들과 동렬에 비교하여 읊조리는 것 만이라도 삼가해주길 바랄 뿐이다.
혹자는 평화로운 시골기차에 골치아픈 주제를 논하느냐고 하시는 분도 있을테지만 복소지란(復巢之卵)이란 말이 있듯이 새의 둥우리가 뒤집어지는 데 그 안에 있는 새의 알이 어찌 성할 수 있겠으며,나라의 형편이 어렵게 되면 시골기차의 레일이 무사하다고 어찌 장담을 하겠는지 싶어 미리 사족(蛇足)을 달아본다.
기원전 중국 진시황 시절 재상을 지낸 사람중에 이사(李斯)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젊은 날, 조그마한 제후국인 초(楚)나라에서 문서를 관장하는 말단 관리 노릇을 하던 때에 어느 날 관청의 변소에서 쥐가 오물을 뒤집어 쓰며 먹을 것을 겨우 구하여 먹다가 인기척이 나면 깜짝 놀라고 겁을 먹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어느 날에는 곡식 창고엘 들어갔는데,곡식을 먹는 넓은 창고의 쥐들은 통통하게 살이 쪄서 사람이나 개를 겁내지 않았다.이것을 보고 이사는 '사람의 잘 나고 못난 것도 쥐와 다를 바 없으니,스스로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느냐에 달려있을 뿐이로다!'라며 깊이 탄식하며 대처로 옮겨가 진나라의 재상에까지 올랐다는 얘기가 있다.
맞는 말이다.
속된 얘기이지만 얼마전 제주지검장의 운전기사가 경찰서에 심부름을 갔다가 경찰관들에게 엄청난 욕설을 하다가 언론에 까지 그 소행이 오르락 내리락 하던 것과 비교가 된다. 경찰서장의 운전기사가 검찰에가서 똑 같은 언행을 보였다면 과연 어땠을까? 궁금해진다.
조금 빗나간 얘기지만 보릿고개로 모두들 굶주리던 시절 어느시골 출신 여성 한분이 가발공장 직공으로 일하다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그 나라의 육군장교를 지내다 지금은 이 나라에서도 사무실을 내고 국제적인 희망전도사가 되어 자서전도 내고 비싼 몸값으로 강연도 다닌다는 기사를 신문과 방송에서 들은 적도 있다.
고등학교시절 교과서를 외울정도의 수재였다면 대학을 진학하든가 꼭 취업을 할것이라면 공무원으로 진출할 길도 있었겠지만 하필이면 가발공장 직공으로 밖에 갈 수 없었던 것도 모두 그 분의 운명이겠지만,
어찌되었던 크게 될려면 큰 물에 가야 된다는 것은 기원전 시대에서나 지금에서나 매 한가지 인 것 같다.
속담에 "사람은 나면 서울로 가고,말은 제주도로 보내야 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 역시 같은 매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10월말 부터 1달여동안 밤낮없이 가을 겆이로 눈코 뜰 새 없이 허우적거리다 이제 겨우 거울 앞에서 정신을 차려보니 땅과 재물을 을 탐하려
서울로 가지않고 마냥 흙을 고집하다가 제주도 아닌 시골로 향한 것이 또한 한 사람의 운명을 바꿔놓게 되는구나 싶다.
"큰 돈을 만질려면 제조 보다는 유통쪽으로..
이재를 생각한다면 노동보다는 자본을 만지는 곳으로 가야.."
귀에 못이될 정도로 들은 얘기들이지만,콘크리트 숲 속에서 다람쥐 체바퀴돌듯한 생활 보다는 비오는 날 지붕위 낙수물 소리 들으며 추위에도 꿋꿋한 쪽파 몇뿌리 캐어 전을 붙여서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는 것이 우선인 사람에게는 아무리 서울이 좋다지만 고향이 좋은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가 보다.
소도둑을 보고 경찰이 왜 소를 훔쳐갔느냐고 추궁하니 썩은 새끼 줄이 보이길래 잡고 따라갔더니 새끼줄 끄트머리에 소가 한 마리 매달려 있더라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나 역시 노후 소일거리로 토지를 조금 마련해둔다고 한 것이 공교롭게 단감나무가 몇 포기 심어져 있었는지라 초창기에는 베어낼려고 하다가 이웃에 살고있는 동네 주민 중 한 사람이 자기가 경작해보겠다고 해서 그리하라고 했는데 임료쪼로 가을에 단감 두어박스 주겠다는 말에 오기가 생겨 주말을 활용하여 직접 경작한 것이 어언 10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첫 해에는 이웃에게 묻기도 하고 인터넷과 ,관련 서적을 뒤져 가며 좌충우돌 개척자 정신으로 경작을 시작하여 농약을 살포하기 시작하면서 점차적으로 농사일이 어렵다는 것을 차츰 알게 되었다.7,8월 되약볕 아래서 농약3통(25말들이)을 살포하면서 생긴 에피소드들이다.
아래와 위 우의를 입고,안경,마스크를 착용한 상태로 작업을 했는데,약통등이 있는 본부석에는 아내가 나의 신호에 따라 전원을 켰다,껐다해야하는 경우가 생길 때에는 거리가 멀어 아무리 큰 소리로 고함을 쳐도 듣지를 못해 처음에는 휴대폰을 이용하다가 고가품이라 땀에라도 젖을까 싶어 "TV드라마 하이킥"에서 무전기를 쓰는 것을 보고는 무전기를 사서 쓰기도 하였다.그 놈의 모터는 왜 그리도 자주 멈추는지 차거운 물수건으로 모터의 본체를 냉찜질을 해가면서 겨우 마칠 때 쯤이면 장화속에는 복숭아뼈까지 땀이 차오르곤 하였다.
지금은 모터도 전기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친구가 무슨 장치를 해줘서 한 번도 끊기지 않게 개선되었고,아내가 TV광고에서 얼음쪼끼가 있다는 것을 보고는 구입해서 어무리 더운 여름철이라 하여도 더운 줄 모르고 하니 굳이 전원을 끄라,켜라할 일도 없으니 무전기도 필요없게 되었다.
그리고 첫 해에는 농약도 무슨 약을 쓰면 되는지도 모르는 상태라서 농약방에서 주는 대로 살포를 했는데 그것이 또 말썽을 부렸다.
처음 짓는 단감농사라 감꽃이 진후 맺현던 열매가 금방 굵어져 주인을 보고는 방실방실 웃는 것같아 사진도 몇캇 찍어놓을 때라 모든 것이 신기했는데,그 날도 농약방에서 주는 대로 농약을 살포한 후 다가오는 첫주말이 되어 농장엘 갔었는데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감나무 잎이 어딘가 모르게 생기를 잃으 것 같았다.그리고 조금 있다가 점심 때가 되니 나무잎이 주루룩 거의 모두가 떨어져 버린다. 아무래도 지난 번 살포한 농약 탓인 것 같아 이리저리 물어보니 원인은 농약이라고 다들 같은 의견을 내 놓는다.농약방에 전화를 하니 주인 내외가 농장에 찾아왔다.
가을에 군 말없이 보상해 준단다.아내는 무슨 약정서라도 받아 두자는 것을 상대측에서 아주 자신있게 이야기를 하길래 야박할 것 같아 그냥 믿고 그 사람들을 보냈다.그런데 막상 가을 수확철이 되어 단감을 수확해보니 수확량이 전년도의 20% 정도 밖에 안된다.그래서 당해 농약방에 가서 얘기하니 처음과는 정 반대의 말들을 하고 있다.
다행히 피해를 입기 전,후 의 사진이 남아있어,그 해의 평균 가격,전년도 경작자의 평균 수확량등 을 정리해둔 상태라서 걱정은 별로 하지 않았는데 농약방측에서 아니나 다를까 법대로 하란다.
"맞아요 잘 얘기했습니다.그렇잖아도 소송준비를 해둔 것이 있는데 보기나 한 번 보세요" 준비된 서류를 보여 주었더니 군 말 없이 산출금액의 절반 값에 합의를 보잔다. 나야 뭐 첫 농사이고 당시만 하여도 빵빵한 회사에서 적지않은 월급을 받고있는 처지이라 도리어 상대측이 괜스레 측은하게 여겨졌다. 마음 변하기 전 시원하게 주겠다 할 때 받고는 마무리 지었다.그 때 약 이름이 베ㅇ랑이다.
옛날에는 풍년이 들면 이유없이 좋아라 하였고,풍년들기를 기원하곤하였지만 지금은 농사라는것이 풍년드는 것이 두렵기만 하고 원망스럽기만 할 뿐이다.이제는 풍년이 농부를 더 이상 행복하게 하지않게 되었다.오늘 뉴스에 보니 제주밀감 가격이 전년대비 폭락하였고,사과,배가 풍년이되어 가격이 하락하였고,단감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몇일 전 단감운송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자동차를 손 볼 일 있어 정비소엘 갔더니 단감농사를 하는 내외가 정비소에 왔다.그런데 안주인의 차림새가 첫눈에 보아서 전혀 여성의 꾸밈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그기에다 벙거지모자까지 착용하고있어 본인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깡통만 한 개 손에 들면 흡사 각설이 스타일이다.아내 역시 얼마 전 작업하던 차림으로 읍내 볼 일 보러 간 길에 제빵가게에 들러 빵을 한 개 살려는데 주인이 맨손으로 빵을 집어주기에 호되게 교육을 시키고 왔다는 얘기를 한 기억이 난다. 이렇게 어려운 입장에서 힘들게 농사를 지어 풍년을 맞게되면 그것이 도리어 재앙이되어 돌아오는 농촌의 현실을 안다면 귀농이라는 말을 그렇게 쉽사리 뇌까리며, 뭐 여의치 않으면 농사나 지으러 간다는 둥 하는 것이 진정한 농업인에게는 모욕을 주는 말은 아닌지 새삼 생각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