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강하다’는 것을 늘 편의점 종업원을 보면서 느낀다. ‘프리타(free+arbeiter)’로 불리는 신(新)하류층을 대표하는 직업군이다. 시급(時給) 900엔 안팎.

물건을 카운터에 가져가면 종업원은 “소주 411엔, 맥주 4개 844엔, 콜라 147엔, 생수 178엔, 합계 1610엔” 하곤 손님을 쳐다본다. 손님이 돈을 건넨다. 건넨 돈을 “1000엔, 2000엔…” 하며 다시 큰 소리로 센 뒤 “2000엔 받았습니다”라고 외친다.

거스름돈도 손님이 보이도록 내민 뒤 큰 소리로 세어서 건넨다. 그러곤 “감사합니다. 또 오십시오”라며 계산을 마무리한다.

수퍼, 양판점, 구멍가게, 남자 종업원, 여자 종업원, 늙은 종업원, 젊은 종업원 다 똑같다. 개미 같은 일본 사람들 천성이 한몫 한다. 하지만 천성보다 중요한 것이 ‘매뉴얼’이다.

이런 말로 인사를 하고, 이런 말로 배웅하고, 큰 소리로 돈을 세어야 한다는 ‘업무 수칙’을 말한다. 종업원은 싫든 좋든 돈을 받고 일하는 이상 매뉴얼에 따른다.

외국인이 “일본은 친절해” 하고 감동하는 대목은 대부분 종업원 마음이 아니라 매뉴얼이 친절한 것이다.

‘프리타’처럼 일본에서 하류층 대접을 받는 공사 인부들은 흔적을 안 남기기로 유명하다. 천장에 붙은 난방기 청소를 하러 온 인부들은 바닥에 비닐 장판을 까는 일부터 시작했다. 난방기에도 비닐을 씌워 내렸다. 그 속에서 난방기를 청소하고 먼지 한 톨까지 몽땅 가지곤 “폐를 끼쳤다”며 사라졌다. 역시 인부들의 마음이 친절한 것이 아니라 난방기 회사의 청소 매뉴얼이 친절한 것이다.

한 아줌마가 유모차를 끌고 도쿄 시내버스를 탔다. 요금 200엔짜리 시내버스는 정차하면 버스 출입구 높이가 보도 블록 높이에 맞춰지는 이른바 ‘논 스텝(non-step) 버스’다. 아줌마는 쉽게 유모차를 끌고 들어왔다. 하지만 버스 운전기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유모차를 좌석에 붙어 있는 고정끈으로 단단히 묶은 뒤 출발했다.

역시 버스기사 마음이 친절한 것이 아니라 버스회사 매뉴얼이 친절한 것이다.하지만 하나하나 생각하면 매뉴얼도 친절한 것이 아니다. 편의점 직원이 열심히 돈을 세는 이유, 인부가 먼지를 쓸어담는 이유, 버스기사가 유모차를 단단히 동여매는 이유는 언제 생길지 모를 사고와 분쟁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술이다.

서울에 있을 때 동네 편의점 직원은 종종 친구와 휴대전화를 하면서, 구멍가게 아줌마는 종종 TV 연속극을 보면서 물건을 계산했다. 이런 상황에서 1000원짜리를 준 손님이 “1만원을 줬다”고 주장하면 팽팽한 싸움만 날 뿐이다.

손님이 자리에 앉기 전에 출발하는 버스기사, 먼지와 흠집을 남기고 떠나는 공사장 인부도 아직 여전할까.

지난 2년동안 일본 가게에서 물건을 팔면서 TV를 보는 주인과 휴대전화를 하는 종업원을 본 일이 없다.

일본은 매뉴얼이 강한 나라다. 종업원에서 사장까지 그렇다.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분쟁을 사전에 방지하는 것은 간단한 매뉴얼과 이를 따르는 집단적 구속력이다.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매뉴얼도 있고, 일본에서만 통용되는 억지 매뉴얼도 있다. 일본의 세계화란 ‘일본적 매뉴얼’을 꼼꼼히 ‘세계적 매뉴얼’로 바꾸는 작업이다.

속도가 느려 보일 때도 있지만, 그래서 개국(開國)의 순간엔 늘 강한 세계화의 내성(耐性)을 보여줬다.

 

 

 

• 선우정 도쿄특파원

su@chosun.com

 

 

 

 

 

 

중국 쓰촨(四川)성 지진 때 2323명의 학생 전원을 무사히 지켜낸 한 중등학교 교장이 화제가 됐었다. 그 교장은 두 가지를 했다. 하나는 학교 건물이 너무 날림인 것을 보고 3년간 여기저기서 돈을 모아 건물 벽 속에 철근을 보강했다. 다른 하나는 재난에 대비해서 1년에 두 번씩 교사와 학생을 대피시키는 훈련을 했다. 그 덕에 교사와 학생 전원은 지진이 나자 2분 안에 대피할 수 있었다. 인근 중학교에서 학생 1000여명이 매몰된 결과와는 대조적이었다.

 

 

 

지난 6월 14일 일본 동북지역에 쓰촨성 지진에 버금가는 강진이 있었다. 하지만 피해는 사망·실종 22명에 주택 12채가 무너진 것이 전부였다. 일본이 고베지진 이후 모든 건물을 강도 8의 지진에도 버틸 수 있게 설계한 결과다.

 

 

 

우리는 일상에서 우리 주변에 닥치는 재앙 또는 자연재해에 대해 무방비, 무관심으로 살아오다가 누가 문제가 있다고 하면 왕창 달려들어 작살을 내고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일상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어쩌다 하는 민방위훈련도 그저 귀찮아한다. 모두가 형식적이다. 당국도 그렇고 시민도 그렇다. 수해가 나고 큰 불이 났어도 그때 한바탕 ‘책임’을 들먹이며 서로 공방을 하다가 얼마 지나면 다 잊어먹는다. 그리고 또다시 같은 지역에 수해가 나고 화재가 발행한다.

 

최근 한 신문에 토목공사 종사자가 다음과 같은 투고를 했다. “토목공사를 하면서 느끼는 것은 우리의 지하공간은 거의 무방비 상태로 각종 시설물이 무질서하게 매설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늘 시한폭탄을 건드리는 기분으로 일을 한다.(중략) 전국의 지하구간 시설물에 대한 종합지도를 서둘러 만들어야 한다.” 그는 지하 통신구를 잘못 건드릴 경우 그 일대에 통신대란이 일어날 것이며, 도면과 다른 곳에 전력구가 묻혀있을 경우 잘못하면 그 일대는 암흑천지가 된다고 했다.

 

 

 

결국 이런 일들은 우리에게 매뉴얼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매뉴얼이란 순서에 관한 이야기고 질서에 대한 이야기이며 공동생활의 이야기다. 어떤 어려움에 처했을 때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지속적인 농도로 대응하는 훈련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 것의 훈련에 관한 교범이 다름 아닌 매뉴얼이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 잘못과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는 약속이다.

 

 

 

 

[말을 위장하라,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말하려는 취지가 무엇인가? 목적에 부합하는 말을 어떻게 기교있게 전달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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